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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 MAHONEY: THE LIFER – 등반을 향한 끝없는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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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Jon Griffith

노천에서 비박을 하며 한숨도 자지 못한 다음 날 온종일 아이스 해머를 휘두르고 나니, 케빈 마오니와 존 그리피스는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당장 캠프가 필요했습니다. 북벽을 오르기위해 3일을 보냈고 마침내 링크 사르(Link Sar)의 복잡한 능선에 들어섰습니다. 링크 사르는 파키스탄 카라코룸 산맥의 몇 개 밖에 없는 7000-미터 산봉의 하나이고 아직 등반이 된 적이 없는 곳입니다. 날씨가 나빠지고 있었고 가혹한 눈은 끝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눈독을 들인 야영지는 코니스 끝을 따라 가장 안전한 포인트의 확인을 요했습니다. 존이 아이스 스크루 2개로 앵커를 때려 박았고, 케빈이 위험을 판단하기 위해 궂은 역할에 착수했습니다. 타이트하게 빌레이를 받으며, 케빈이 탐침봉으로 8, 9, 10피트까지 찌르고 조사하며 한발 한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다음 스텝에서, 코니스가 붙어 있는 지점(attachment point)을 지나자마자, 코니스가 분리되면서 자동차만한 크기의 눈덩이가 아래로 뚝 떨어졌습니다. 단단한 바닥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깨끗한 추락이어서, 케빈이 다시 등반하여 올라올 수 있었으나, 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코니스는 불안정하다는 것. 코니스 가장자리에서 먼 곳에 이들이 얼른 캠프를 세웠습니다. 코니스에서의 텐트 비비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로 쓸 만하기는 했습니다. 케빈은 가족이 생각났습니다. 아내와 딸들, 즉 ‘여자들’의 사진 한 장이 늘 그의 가슴 포켓 안에 고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지만, 앞으로 가야 할 지형이 많고, 이들이 있는 곳이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케빈은 버몬트 태생의 45세의 알피니스트로 근 25년이나 이 게임을 해오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알라스카까지의 온갖 곳에서 등반을 하여 수없이 상을 받았고 머그 스텀프와 골든 피톤 같은 상도 받았습니다. 아무리 겸허하게 말해도, 케빈은 기량이 뛰어난 산악입니다. 하지만 파키스탄에 간 적은 없었습니다.

존 그리피스 역시 알피니스트이고 사진 작가이며 마호니의 술친구인데 샤모니 출신입니다. 존 자신도 경력이 상당하며, 이번 원정을 위한 존의 파트너가 빠지가, 존이 마지막 순간에 케빈과 같이 가겠다고 청했습니다. 이번 여행이 케빈에게는 꿈의 원정이었습니다.
산악 가이드이고 블랙 다아아몬드의 파트 타임 테크 렙(tech rep)이며 와이프인 클레어와 애니카와 엘리자라는 두 딸이 있는, 가족적인 타입의 사람이어서, 대개 케빈은 이런 규모의 원정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집 가까이 있거나 되도록 더 많은 날을 샤모니나 알라스카에서 가이딩 활동하는 데 주력하려고 합니다. 열흘간 집을 떠나 있는 것 또한 꽤 긴 시간이며 그런 삶의 방식이 그와 그의 부인과 두 딸에게 적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같이 예상치 않던 기회가 생기면 거절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케빈이 함께 하겠다고 했고, 집을 떠나 있는 기간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물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고, 클레어를 설득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노련하게 여러가지를 잘 조율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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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Dom Francis

뉴햄프셔 출신인 케빈이 클레어를 만난 건 그가 NOLS를 위해 가이드 활동을 하고 있었고 클레어는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산에서 온 종일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있기에 가장 좋은 곳이 바로 그 주방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13년이 되었고, 이제 애니카와 엘리자가 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당일 가족 여행을 많이 갔습니다. 스키타고 하이킹하고 대체로 숲 속에서 신나게 뛰어 놀았습니다. “유대감을 돈독히 하는 시간이지만, 또한 라이프스타일이기도 했다”고 케빈이 말합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거의 매일 가족이 자리를 같이 하지만, 마호니의 크고 중요한 마운틴 미션으로 장기간 집을 떠나는 기간 동안은 가정을 떠나게 된다는 점, 매일 매일의 가정 생활의 복잡한 일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점 등의 손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가 원정을 가면 클레어가 힘들 수 있지만 케빈 역시 힘듭니다. 왜냐 하면 케빈은 아침에 서둘러 유치원에 보내는 일 또는 딸들과 같이 개 데리고 하는 산보 같은 일상생활의 소중한 순간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알피니스트가 되는 것의 대가”라고 케빈이 말합니다.

 

등정하기가 까다롭고 두 개의 유명한 봉우리가 있는 링크 사르(Link Sar) 처녀봉은 적지 않은 숫자의 알피니스트를 패퇴시켰습니다. 1979년, 일본 클라이머 그룹이 동벽 최초의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이 지역이 폐쇄되었다가 드디어 2000년 대 초에 다시 오픈되었습니다. 그 이후 소수의 클라이머가 정상에 이르고자 시도했으나–남벽과 서벽을 통해—객관적 위험이 많아 모든 그룹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링크 사르는, 존이 강조하듯이, “한쪽은 K7 산 군이 다른 쪽은 죽음의 계곡 사이에” 끼어 있고 탈레반 통제 지역을 지나 접근하므로, 그곳에 이르기가 전혀 쉽지 않습니다. 그 두 봉우리는 오직 그 산 위에서만 보이고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밑의 계곡 바닥에서 보면, 제대로 보기가 힘듭니다. K7이 가려서 대부분이 안 보이며, 볼 수 있을 정도로 뒤로 물러나면 K6에 닿고 맙니다. 링크 사르는 불가사의한 고딕 풍의 아름다움이 있는 봉우리의 하나인데. 이 두 가지 점에 존이 매료되어, 전에 두 번이나 그 정상에 이르려고 애를 썼던 겁니다.

존콰 케빈이 2014년 7월 초에 이슬라마바드 도착했습니다. 애초에 마호니는 원정기간을 5주로 계획했습니다. 7천 미터 고봉을 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죠. 하지만 일과 가정에서 그가 최대한 짜낼 수 있는 기간은 그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시간을 현명하게 나누어 써야 했습니다. 7월은 베이스캠프까지 가서 몇 개의 좀 작은 산봉에서 고도 적응을 하며 보냈습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의 청명한 날씨 속에서 8월 1일, 링크 사르를 향해 출발하여, ‘차라쿠사(Charkusa)’ 빙하를 통해 어프로치 하여 K7과 링크 사르 사이의 비좁은 계곡 위로 올라갔습니다.

 

griffith_linksar_5581Photograph: Jon Griffith

 

세 번째 시도를 위해 여러 달 동안 존이 트레이닝 하긴 했으나, 케빈은 최근에 교체된 멤버였습니다. 원정 직전에 두 달간 훈련했는데, 일과 사이사이에 겨우 훈련 시간을 내어, 사실상 전보다 트레일 러닝을 조금 더 한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훈련 시간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존과 케빈이 전에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그 능선까지 이르는 북벽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 능선 위로 올라서려고 안전한 지점을 찾고자 조사하고 난 다음, 그 코니스가 휙 떨어져 나갔습니다. 충격을 받은 이들이 겨우 몇 시간 전에 코니스가 휙 떨어진 곳 근처에서 3일 째 밤을 차분하게 보냈습니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밖에 계속 눈이 내리면서 차츰 깊게 쌓이고 있었습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위험도가 높은 등반 중에는 가족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늘 철저히 자신을 컨트롤 해왔지만, 이제 차츰 케빈에게 가족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야영지를 파내고 휴식을 취하고 몸에 수분을 공급하며 지냈습니다. 그들이 상황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예상했던 만큼 빨리 가고 있지 않고, 정상까지는 수직으로 겨우 300 내지 400 m 거리이지만, 정상까지 가려면 아직도 복잡한 능선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쪽 정상까지의 거리는 500 미터 정도이지만 주봉까지는 아직도 1km 거리였습니다.

8월 5일 동틀 때 눈이 더 많이 내렸습니다. 코니스가 무너질 염려가 있어, 좋은 장비가 있어야 할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선등을 나서 보니, 존이 발견한 모든 것이 믿음직하지 못했습니다. 기포가 많은 얼음으로 인해 사실상 스크루가 무용지물이었고, 바위는 전부 금이 가있었습니다. 60미터 내내, 존이 조사하고 탐색했지만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후퇴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케빈에게 집에 둔 가족이 없다면, 계속 도전해보려는 유혹을 느꼈을 수도 있으나, 리스크가 너무 컸습니다. “위험한 지형과 상황에서는 물론 가족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정확히 그 순간에 몰입하여 결정한다”고 케빈이 말합니다.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고 덜 악화되도록 할 수 없으면, 그런 일에는 착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들이 빙하로 돌아 왔을 때, 아이러니 하게도 날씨가 다시 맑았습니다. 하지만 겨우 며칠 밖에 남지 않아, 한 번 더 시도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케빈은 다시 정상 시도를 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 그 반면 존은 이번 여름에 돌아올 예정이고, 케빈에게는 이번 시도가 정직한 노력이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케빈의 산 사랑과 가족사랑 사이에는 충족시켜야 하는 균형점이 존재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온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때로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죠.”

“저에게는 그것이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결정입니다. 그런 식의 결정이 내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결국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등반이 안전하고 편한 상황인지에 관한 나의 객관적 컴포트 레벨(comfort level)을 넘어서면, 저는 돌아섭니다. 두 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케빈을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가족에게는 스트레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저의 열정을 약화시키진 않으나, 때때로 저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 만드는데, 제가 깨닫게 된 점은 어느 모로 봐도 이것이 이기적인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케빈은 이제까지 줄을 함께 묶어본 사람 중 가장 터프한 클라이머입니다“라고 존은 말합니다. ”같이 줄을 묶어본 사람 중 악조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람을 꼽자면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등반과 가족)에 대하여 동등한 ‘열정을 느끼는’것이 그를 더욱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결국 케빈은 좋은 밸런스를 찾아냈습니다.

“산의 매력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때로는 판단력을 굉장히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케빈은 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제가 내일 잠에서 깨어나거나 또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일 아내와 잠자리에 들거나 그렇지 못하게 되더라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산비탈에서 죽으면, 실제로 우리를 지탱해주던 삶의 이면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LOG_BD_KevinMahoney_HighRES_047Photograph: Dom Francis

Whitney Bo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