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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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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쿼미쉬의 새로운 라인 테인티드 러브(Tainted Love) 등반하고 있는 모습.
촬영: 조니 베이커  

사람의 능력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크게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재능 이론과 실전 이론입니다. 재능 이론은 사람의 특정 분야에서의 능력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알렉스 메고스와 마고 헤이즈는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크림프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매력적이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재능 이론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능력은 훈련을 통해 습득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바로 실전이론입니다. 저도 매튜 사이드 작가의 “바운스 (Bounce)”라는 책을 읽기 전까지는 훈련이 개인의 능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막연하게 느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분야에서 훈련은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뛰어난 기량의 클라이머가 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신체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타고 나야 합니다. 선천적으로 수를 향한 애착 없이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수 없으며, 음악가에게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필수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습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문에 재능 이론은 우리에게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이지만, 우리가 노력이라는 이름 아래 흘린 피와 눈물을 한순간에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저주이기도 합니다. 능력을 발전시킬 수 없다면 노력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저에게 수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수에 밝지 않았고 심지어 지금도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지레 겁부터 먹곤 합니다.

“바운스”에서 사이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능은 100% 연습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완벽한 책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훌륭한 책인 “바운스”에서 인용한 연구들은 꽤나 설득력이 강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몇 가지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의 음악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실험. 다양한 그룹의 학생들의 시간당 발전하는 능력의 속도가 거의 동일했으며, 상위권과 나머지 그룹을 가르는 단 하나의 차이는 훈련시간뿐이었다.

*평범한 수학 능력과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연구. 그는 처음에는 한 번에 7자리 숫자만 암기할 수 있었지만(일반적인 평균 수치), 수년의 훈련 끝에 당시 세계 기록이었던 100자리가 넘는 숫자를 암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영재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실제로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헤이즈는 모차르트를 포함한 모든 음악가가 소위 말하는 본인의 히트곡 하나를 작곡하기까지 최소 10년의 공부를 필수적으로 거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3살부터 연주를 시작한 모차르트가 종종 타고난 재능의 예시로 쓰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최소 일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일만 시간의 법칙은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되었다.

*가드웰의 아웃라이어즈(Outliers)나 로버트 그린의 마스터리(Mastery)가 이 일만 시간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학교 하키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상위 팀에 속해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의 생일이 연초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선수 선출이 12월에 진행되기 때문에 생일이 연초에 있는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최대 1년을 더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반사 신경과 민첩성은 상위권 테니스 선수들 사이에서 최고를 기리는 필수 요소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혀있지만, 영국의 탑 플레이어의 반응 속도를 측정해본 결과 평균보다 느리게 나옴을 확인했다.

물론 책에서 자세히 이야기되진 않았지만 조금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연구들이 현역 선수들과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때문에 이것은 훈련이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지만 동시에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게 됩니다. 아이가 악기를 연주하거나 하키에 입문하기까지는 이미 무언가 타고난 게 있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물론 이외에도 책에서 다루지 않은 개인의 관심사나 동기 또한 깊게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실전 이론을 반박하는 주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만 시간의 훈련 끝에도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운전을 예로 들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운전을 하지만 그것에 통달하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운전 기간이 길수록 운전 실력이 감퇴하는 경우 또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실전 이론을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훈련”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합니다. 모든 훈련이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훈련에는 그냥 훈련이 있고 목적의식이 있으며 결의에 찬 훈련이 있습니다. 능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은 도전적이고, 체계적이며, 일관성을 가지고 제대로 분석되어야 합니다.

클라이밍에서 목적의식이 있는 훈련은 어떤 것이며 클라이밍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뒤처지는 것일까요?

프로 골퍼는 서로 다른 각도의 포지션에서 어려운 샷을 수없이 반복하고, 그때마다 코치와 함께 샷을 분석하며 발전을 위해 노력합니다. 탁구 선수는 코치와 함께 빠른 공으로 높은 강도의 훈련을 반복합니다. 테니스 선수는 달마다 수백 번의 서브 연습을 합니다. 올림픽 스케이트 선수는 챔피언의 자리에 서기까지 수천 번을 넘어지죠. 물론 클라이머들 또한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테니스 선수의 훈련과 같은 종류의 목적의식을 가진 훈련일까요? 저는 많은 클라이밍 선수들이 목적의식을 가진 훈련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같은 볼더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약점을 보완하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은 한 번 완등하면 그걸로 끝이고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등반 문화는 “완등”만을 추구하고, 한 번 완등한 루트를 다시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시 시도했을 때 문제가 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인데, 그럴 경우 우리의 자존감은 떨어지고 참담한 실패의 기분을 느낍니다. 한 테니스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난 컨디션이 최상일 때만 테니스를 쳐”라고요. 아마 그의 코치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경기 때 선수의 컨디션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깐요. 클라이머에게는 무엇을 배웠는지 보다도 완등이 전부이고 종착지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완등했다 하더라도 일단 완등한 이상 다시 시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분명히 배울 점은 있을 텐데도 말이죠. 우리는 종종 자신의 스타일에 맞으면서 후한 그레이드로 쉽게 완등할 수 있는 루트들을 찾아다닙니다. 과연 이것이 목적의식이 있는 훈련이라 할 수 있을까요? 클라이밍에는 또한 신체적 능력만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내가 프로젝트를 완등하지 못한 것은 손가락이 너무 약해서야, 혹은 내 팔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야”처럼 말이죠.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에게 “트레이닝”이란 신체적 강함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왜 누군가는 강력한 신체능력을 가지고도 같은 경력에 그보다 더 약한 손가락과 팔 힘을 가진 누군가보다 쉬운 그레이드의 등반에 머물러 있는 걸까요? 클라이머는 트레이닝 이외의 목적의식이 있는 훈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클라이밍이 매우 정교하고 기술적인 스포츠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꽤나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클라이밍은 기본 스킬을 익히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신체를 단련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힘과 그레이드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통계는 전혀 다른 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발전을 목표로 등반하는 클라이머와 완등만을 바라보고 등반하는 클라이머 사이에는 중요하고도 큰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가 결국 평범과 최고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키나 체형 같은 유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최고의 농구 선수가 키가 작은 선수일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 발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러한 유전적인 요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경지에 다다름을 “스스로가 발전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정의한다면 상위 1%의 클라이머가 되느냐 마느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물론 통달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큰 사람이 등반하는 어려운 루트를 작은 사람이 등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아주 작은 사람도 그보다 큰 사람에 못지 않게 클라이밍이라는 스포츠에 통달할 수 있다고 말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단지 예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목적의식 있는 훈련과 통달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또한 왜 모든 사람들이 목적의식 있는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 걸까요? 월드 챔피언 스케이터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20,000번을 넘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고작 몇 번의 시도로 완성될 수 있는 기술은 정작 중요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루트를 오르기 전까지 우리는 수없이 떨어집니다. 때문에 누군가는 최고와 평범을 나누는 기준은 실패에 대처하는 건강한 자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자세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패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를 배움의 기회로 바라봅니다. 실패는 피드백이며 일류는 그것을 배우는 과정으로 승화시킵니다. 골프 선수가 연습 중에 샷에 실패했다고 해서 필드를 박차고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시도하고 더 나아질 때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더 어려울까 고민하기까지 하죠. 배움을 위해서 같은 루트를 반복해서 시도하는 클라이머는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실패는 역경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실패를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쉽진 않겠지만 이런 생각의 변화가 일류와 이류를 나누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